후한말,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된 삼국 정립의 시기.
중국역사에서는 왜 삼국시대가 아니라 위진남북조라 말하는 것일까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와는 다르게 정사 '삼국지'를 보다 보면 김빠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촉나라와 오나라가 멸망하는 부분이죠.
어쩌면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 이렇게 짧고 허무하게 끝나는가 하는 느낌말입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위나라 군대가 이동하는 기간을 빼면 거의 한, 두 달 만에 싱겁게 전쟁이 끝납니다.
(현대전도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는데 말이죠..)
먼저 촉 멸망의 실제 기록을 봅시다.
263년 여름, 위나라가 대대적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여러 갈래로 촉을 공격하였다.
촉은 장익, 요화, 동궐 등을 파견하여 막았다.
이 해 겨울, 등애(위)는 제갈첨(촉)을 면죽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유선은 항복하였다.
즉 여름에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겨울에 전쟁이 끝났다는 얘기지요.
위에서 촉까지 가는데도 여러 달이 걸리는 거리이고 도중에도 각종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을 터인데도 이렇게 빨리 전쟁이 끝납니다.
오히려 위나라 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보다 짧지요
(예를 들면 위나라 장수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는 데 거의 10개월이 걸립니다).
그런데 촉나라는 그래도 오나라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자, 오나라를 보시죠.
279년 겨울, 진나라는 사마주, 왕혼, 주준, 두예, 왕준 등에게 오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280년 3월 15일 손호의 투항을 접수하고 손호의 결박을 풀어주고 관을 불태우고 나서 초청하여 만났다.
오나라의 멸망도 실제적인 전투가 거의 없이 투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겨울에 진군하여 봄에 항복을 받았으니 이것이 과연 국가 간의 전쟁인가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마치 미국과 이라크, 또는 미국과 아프간의 전쟁을 보는 듯합니다.
도대체 왜 이럴까요? 첫번째 그림은 여러분이 게임이나 책 등을 통해 흔히 보시는 삼국지 시대의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보자면 삼국의 영역이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특히 오나라는 마치 위나라보다도 더 크게 묘사가 되어 있고 심지어는 베트남 북부까지 점령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촉의 경우도 위나라의 70% 정도의 크기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그랬을까요?
오나라의 경우는 멸망 당시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행정력이 확실히 미친 영역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최대 영역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과장하기 위해서라도 적의 국력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오나라의 경우에는 중앙집권화가 매우 느려 잦은 내분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중앙의 행정력이 오나라 전역에 제대로 미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중국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인 미야자키 이찌사다(宮崎市定)는
호수와 인구로 판정한 국력을 6(위) : 2(오) : 1(촉)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에 위나라의 영역에서는 수많은 전란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민이 발생했던 점을 고려해도
실제의 국력 차이는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국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①경작지의 크기와, ②인구 수 뿐만 아니라, ③그 국민들이 하나의 국가의 구성원으로 확고한 의식 등이 있어야 하는데
오나라는 촉나라보다도 더 못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나라의 손권은 오랫동안 황제를 칭하지도 못했고
후에 오나라는 위나라의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도 잘 하지 못한 것이죠.
이에 비하여 조조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황위(皇位)에 오르지 않고
한 황제를 옹립하고 있었으므로 나관중 삼국지와는 달리 일반 민중들에게는 위나라의 대의명분은 훨씬 더 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비는 9주 중 익주 하나를 겨우 장악하고 통치했고,
손권은 9주 지역을 벗어난 강동 지역을 장악하여 통치했습니다.
후일에 이들이 온 힘을 모아서 장악한 것이 형주와 양주의 일부였지요.
이들을 위나라와 맞서는 국가로 봐야 할까요?
네네, 충격적이십니까? 오호장군의 무력, 적벽전투, 제갈량의 신기는 어디갔냐구요?
정리도 안 되고 정신 없으시죠? 더 갑니다, 더 가.
그 동안 여러분들이 보셨던 광활한 오나라나 촉나라의 영역은 당시에는 중국이라고 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당시의 생산력으로 볼 때 오나라의 영역은 습지가 많았고,
촉 땅의 남부와 서북부는 험준한 산악 지대이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없는 지역입니다.
특히 오나라 지역은 한나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나라들로 나눠진 지역이었고,
지방 호족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관중 삼국지는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가 서로 대등하게 맞서 싸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나 역사책들이 그들의 영역을 과장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프론티어를 현대적인 국경 개념인 보더 개념으로 혼동한 것이지요.
소설 속 얘기는 잠시 잊고 과거의 사건들을 나열해봅시다.
사실은 위, 오, 촉 삼국이 서로 맞서 싸운 것이 아니라 위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려 한 것은 아닐까요?
네, 제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위 입장에서 촉과 오는 그저 반란군 정도(?)라는 겁니다.
촉나라는 익주, 오나라는 강동 지역을 장악하였는데 그 나머지는 대부분 위나라의 통치 구역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나라와 촉의 영역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셨을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좀 다릅니다.
2번째 그림은 위성지도 위에 위,오,촉의 영역을 산악지대를 제외하고
당시 경제의 기반이었던 곡창 지대와 인구 밀집지역인 도시, 교통 요지 들을 중심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 즉 국가 지배자가 통치력을 나타낼 수 있는 지역을 표시한 영토라는 거죠.
이렇게 놓고 본다면, 사람이 살 수 있는 중국의 모든 영토는 위나라의 것이라는 것이 되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는 중국의 중심 영역은 장안-낙양-연주-서주-예주 지방이라고 보면 됩니다.
즉 북쪽으로는 기주 지역과 황하 이남, 남쪽으로는 양자강 북부지역이라고 볼 수 있지요.
따라서 조조의 위나라가 차지한 영역이 바로 중국문화 및 역사의 중심무대였지요.
촉나라는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지역이고, 오(吳)나라는 양자강 남부 지역이어서
당시의 군사기술로 보아서 정벌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또 위나라의 입장에서 봤었을 때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서 차지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별로 없는 땅이기도 했습니다.
"국력이 남아돈다면야 차지해보겠지만..." 정도의 땅이랄까요?
이 두 땅은 중원과는 매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중국사 전체에 큰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현대 중국을 생각해봅시다.
대만(臺灣)이 과연 중국의 안전에 위협이 될까요?
또 위협이 안 된다고 해서 중국이 대만에 신경을 안 씁니까?
현대 중국의 건설자인 등소평(鄧少平)의 평생소원은 대만의 흡수통합이었지요.
위나라 - 촉나라, 오나라의 관계는 현대의 중국과 대만의 관계라고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실 대만 원주민들은 피해자입니다.
장개석이 모택동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1949년 이후 줄곧 군사적으로 대치해왔습니다.
그 와중에서 수많은 대만 원주민들이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를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갈량이 맹획(孟獲)을 정벌하는 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삼국지의 제갈량은 멋있지만, 남만인들에게 제갈량도 그런 모습이었을까요?
촉의 상태도 이와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유장(劉璋)이 계속 통치를 했다면 촉 땅의 사람들은 별 피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도 없이 자연스럽게 조조의 위나라에 편입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혼란도 없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유비가 크게 패하고 중원 땅에서 형주를 거쳐 촉 땅으로 도망쳐 들어와서 군대를 만들고
틈만 나면 북벌(北伐)이니, 한실부흥(漢室復興)이니 하니까 촉의 백성들이 얼마나 시달렸겠습니까?
그렇다고 하여 전쟁이 승산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교두보 하나 확보를 못하니 촉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짜증스러운 일이었겠지요.
후에 제갈량이 멍청이라서 위의 수도를 최단 루트로 공략하지 않은 게 아니라,
촉의 전국력과도 맞먹는 영토인 위나라 서북지방을 재패하는 것만으로도
정치가 제갈량에게는 버거운 일이었거든요.
애당초 유비(劉備)나 손권(孫權)은 그 근거지가 천하 통일의 여건이 안 되는 지역입니다.
특히 촉나라는 당시 중국의 오지로 제갈량이 성도(成都)에 도읍을 정한 것도
수레나 우마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험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절대 약체였던 촉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후일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할 때 보급로 문제를 겪게 하기도 합니다.
삼국이 멸망한 후 무려 5백여 년이 지난 후 당나라의 시전(詩仙) 이백(李太白)은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로 오르기보다도 힘들구나(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하였습니다.
촉 땅은 참으로 두메산골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위(魏)나라는 중원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족의 중심무대로 산업 발전의 중심지였으며, 물자도 매우 풍부한 지역이었지요.
아무래도 유비가 한 개의 주를 차지하고서 황제를 칭한다는 것이 좀 심합니다.
영역으로 보면 원술(袁術)보다도 더 한심합니다.
중국의 그 넓은 천하에서 겨우 한 개의 주를 통치하면서 황제를 칭하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이 아닐까요?
위나라는 이에 대해 용납할 수 없어 두 번의 대대적인 정벌을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홍수 때문에 철수하고,
두 번째에는 큰 전투 없이 성도를 점령하고 촉의 역사는 끝이 납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관도대전(200)으로
조조는 기존의 장안-낙양-연주 등의 지역을 아우르고 유주,병주,청주,기주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 때 중국은 사실상의 통일된 국가라고 보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따라서 삼국지라고 하지만 삼국지로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나관중 삼국지에는 위촉오가 거의 대등하게 대립 투쟁한 듯이 나오는데 이것은 후대의 과장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TEXT 파일과 그림파일만 덜렁 있던 글. 출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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