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倭)왕권이 한반도의 임나 지역을 정복하여 현지에 직할 통치기관을 설치하여 왜는 이를 기반으로 4c 중엽(369)부터 6c(562)까지 약 200년간 가야를 비롯하여 백제, 신라 등의 한반도 남부를 직접 경영하며 북쪽의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1949년, 쓰에마스는 위 내용과 같은 '임나흥망사'를 저술하여 4c에서 6c 중반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임나는 '가락,가라,가랑' 등으로 불리는 가야를 의미합니다. '임나'라는 표현은 한국, 일본 양쪽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국 기록으로는 '강수는 임나가라 사람이다'라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가야의 일부로서의 임나를 인식했습니다.
일본 기록으로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처음 발견되게 되는데 임나라는 용어가 많이, 또 집중적 언급됩니다. 이 책에서 일본이라는 용어 또한 처음 등장하게 되죠. 하지만 이보다 앞선 일본의 역사 기록인 고사기(古事記)에는 임나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일본이라는 용어는 7c 중반 타이카 개신(645) 이후 국호로 사용된 말로서 이것은 3c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모순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왜곡된 진실 임나일본부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740년 '일본서기'가 저술 된 후, 1720년 덕천광국에 의하여 대일본사(大日本史)가 저술되었습니다. 대일본사는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기록을 발췌하여 '임나전' 이라는 부분을 따로 빼내어 정리했습니다. 이어 19c 말 정한론(征韓論)의 대두와 함께 임나일본부설도 활발한 연구되었죠. 쯔다의 「임나강역고」(1913), 이마니시의 「가라강역고」(1917) 이 두 책에 이르러서는 임나일본부를 기정사실화 합니다.
1924년 쯔다라는 사람에 의해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라는 책이 쓰여지게 되는데 이 책은 사료비판, 문헌비판적 성격의 책으로 '일본서기는 일왕을 찬양하기 위해 과장, 윤색, 삭제, 첨가 등을 통해 변형된 책, 백제 3서(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의 내용을 토대로 백제 주체의 기록을 일본 주체의 기록으로 변경' 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합니다. 즉, 일본서기는 믿기 어렵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래도 쯔다는 임나일본부는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이런 헛된 애국심...ㅠ).
일본이 주장하는 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쓰에마스의 「임나흥망사」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중국 송서 왜왕책봉기와 한국 광개토대왕비, 칠지도를 증거로 내세움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49면 369 징구황후의 가야 7국 정벌 기사
황전별, 녹아별 장수를 파견하여 정복,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점
광개토대왕비문 신묘년(391) 기사의 일본식 해석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한국식 해석은 아래쪽에서 설명)
송서 왜국전 왜왕 임명기사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호칭 요구
→「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 책봉
(하지만 책봉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죠.)
일본서기 민달기 4년(575) 2월 기록
신라로부터 임나의 조(調)를 특산물로 바쳤다는 기록
칠지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 일본서기 신공기 52년(372) 백제 봉헌설(헌상설) 주장
(한국의 경우, 동진하사설(동진→백제→왜) 혹은 백제하사설(일왕=백제태자) 주장)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주장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로, 앞에서 쯔다가 언급한 것처럼 주근거자료인 일본서기의 신뢰성이 많이 부족합니다. 또 역사발전단계상 야마토정권은 6c에 이미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바다를 건너 이국에 침략할 수 있는 국력이 없었죠. 한반도 남부에 일본 유적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잘 말해줍니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반론들 또한 존재합니다.
북한학계 김석형(1963)은 '삼한삼국 일본열도 내의 분국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임나일본부는 가야 계통의 유이민 집단이 일본 열도 내에 세운 분국으로 규정했습니다.
일본학계 이진희(1972)는 일본이 근거로 삼은 광개토대왕비문이 변조되었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에 대한 근거로 일본군 참모부가 저지른 석회질과 중국 왕건군 최씨 부자의 만행을 들었습니다.
남한학계 천관우(1978-79)는 '복원가야사'에서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파견군 사령부였고 임나관련 기록의 주체는 일본이 아니라 백제라고 주장합니다.
남한학계2김현구(1985)는 '야마토정권의 대외관계 연구'에서 6-7c 야마토정권은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제공받고 군사력을 제공하는 용병국가였다고 주장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제일 중요한 접점은 광개토대왕비의 해석에 관한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삼는 구절 부분에 3글자가 지워져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 2년(414)년 걸립된 6.39m, 27t, 4면 44행, 1775자, 14x15cm의 글자크기를 가진 비석으로 처음-1면6행」까지는 서사시(업적) 형식, 「1면7행-3면7행」 대외적 정복활동, 「3면8행-끝」 수묘인 330호에 관한 규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대 발견되어 1884년부터 일본군 참모본부의 해석 및 연구되었고 1940년데에 이르러 한국에서도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임나일본부를 증명하려는 일본의 해석/연구 방향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倭 以 辛 卯 年 來 渡 海 波 百 殘 □ □ □ 羅 以 爲 臣 民
( 왜 이 신 묘 년 래 도 해 파 백 잔 □ □ □ 라 이 위 신 민 )
일본은 □□□ 부분에 임나신(任那新)을 넣어 해석합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倭以辛卯年來渡海) / 격파했다(波) / 백제, 임나, 신라를(百殘任那新羅) / 그래서 신민으로 삼았다(以爲臣民)
우리나라에서는 □□□ 부분에 연침신(連侵新)을 넣어 해석합니다.
왜가 신묘년에 오니(倭以辛卯年來) / (광개토왕이) 바다를 건너가서 격파했다(渡海波) / 백제가 신라를 계속 침략하여(百殘連侵新羅) /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以爲臣民)
이어지는 병신년(396) 기사를 보년 다음과 같습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에 대대적인 공격을 하여 58성을 격파하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
문맥상 따져보면 갑작스럽게 왜가 등장했다가 바로 백제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일본의 기록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왜가 쳐들어와서 격파했고, 신라를 백제가 침략했지만 이 또한 격파했다' 이쪽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기록목적 자체가 광개토대왕을 찬양하는 것이니까요.
덧붙여서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여에서 백제로 이주(마한,변한)한 집단이 한반도 정세 변화에 의해 큐슈와 쯔쿠지로 이동했고, 왜한연합정권 구성하여 4c 후반 기나이 지역으로 진출 후 야마토정권 건설했다는 설입니다. 이 논리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과 조선이 하나이며, 때문에 조선과 일본은 한나라인게 당연하다는 남선경영론에 이용되었으나 이론만 보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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